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레 영화 (문단 편집) == 역사 == [[남아메리카]] 대륙 국가들 중에서 가장 영화의 도입이 빨랐다. [[1895년]] [[2월 17일]] 수도 [[산티아고(칠레)|산티아고]]에 최초의 [[영화관]] 영사기인 Kinetoscope가 도입되어 첫 [[영화]]가 상영되었다. [[브라질 영화]]와 [[아르헨티나 영화]]가 [[1896년]], [[베네수엘라 영화]], [[콜롬비아 영화]] 시장이 [[1897년]]을 출발점으로 한 것에 비해서 칠레는 그 시작부터가, 출발이 빨랐다. 그럼에도 정작 [[남아메리카]]에서 유성영화로 전환한 시기는 제일 늦다 (....)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1936년]], [[콜롬비아]]가 [[1938년]]에 유성영화로 전환완료한 것에 비하자면.... 칠레산 자국영화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무성영화를 만든 것은 [[1931년]]이었으나, 무성영화 스크린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전면적으로 국내 [[영화관]]들이 유성영화로 바뀐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42년]]에 와서야 달성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1942년]]에 칠레에 수입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기 위해서라도 [[영화 시장]]이 유성영화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이후 전 세계의 경제가 성장하고 [[GATT]]를 통해 [[무역]]질서가 잡히자, [[구리]]와 [[석탄]]을 수출하는 구리 자원수출국인 [[칠레]]도 [[국제무역]] 무대에서 [[수출]]로 외화를 벌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국내산업인 칠레 영화도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는다. 자국 영화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영화법도 [[남아메리카]] 대륙 국가들 중에서 빠른 편인 [[1951년]] 제정했다. [[1962년]]부터 [[1988년]]까지 26년 간 자원수출국인 칠레 영화는 세계경제의 성장세와 발맞추어 국내시장이 동반성장하는 등 최전성기를 맞았다.아옌데 정권 시절 활동을 시작해 칠레 전투라는 좌익, 좌파 다큐멘터리에 큰 획을 그은 '''[[파트리시오 구즈만]]'''을 비롯해 남미대륙 초현실주의에 속하면서 영화문법에 혁신을 가한 '''[[라울 루이즈]]'''나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같은 거장들이 세계영화계에도 큰 파란을 일으켰다. 물론 이후 피노체트의 군부독재정권 때문에 탄압을 받긴 했지만 [* 파트리시오 구즈만, 라울 루이즈,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모두 조국을 떠나서 유럽에서 활동해야만 했다. 구즈만은 민주화 이후 칠레로 돌아왔지만, 루이즈와 조도로프스키는 반쯤 프랑스 감독화되었다.], 이 세 감독과 동료들이 해외에서도 영화사에 남을 걸작들을 만들며 왕성하게 활동했기에 칠레는 아르헨티나나랑 브라질과 함께 남미대륙의 영화계에서 거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붕괴한 [[1990년대]]들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계무역기구]]([[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고 [[칠레]]가 [[자유무역]]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외화시장을 대규모로 개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영화관]] 사업체들이 [[미국 영화]] 시스템을 본딴 [[멀티플렉스]]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역 단관극장들이 멸종했다. 칠레 영화의 품질은 성장했지만 단관극장들이 멀티플렉스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화관]]이 폐업하는 결말을 맞는다. 이 때문에 시장규모가 줄어들어서 크나큰 고난을, 아픔을 겪었다. [[2000년대]]부터는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중국으로 자원을 내다팔고, [[한칠레 FTA]]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에도각종 지하자원과 [[농산물]]들을 대거 수출하면서 칠레는 다시 [[외환]](외국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칠레 영화산업은 [[1990년대]]의 혼란기를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재성장했고, 멀티플렉스 사업체들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대침체]]는 칠레도 피해가질 못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세계경제의 침체로 자원 가격이 곤두박질치자, 덩달아 칠레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칠레 영화산업도 같이 곤두박질쳤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 그나마 다시 칠레 영화들은 성장세를 맞고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 대신 [[상업영화]] 위주의 [[멀티플렉스]] 성장이고 [[미국 영화]]들의 독주를 견제하기 힘들어하고 있다. 그렇지만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칠레 영화사상 최초로 자국에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안겨준 [[판타스틱 우먼]]의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나 [[재키(영화)]]로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파블로 라리안 [* 보수우파 국회의원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같은 신진감독들이 발굴되면서 인재면에서는 오래간만에 활기를 띄고 있는 중. 쉽게 말하자면 칠레 영화시장은 자원의존국가인 칠레의 특성상 '''자원가격변동에 내수경기, 이에 따라 영화시장까지도 같이 덩달아서 연동'''되고 있다. 따라서 칠레 영화시장의 역사와 칠레 영화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가늠해 보려면 자원, 특히 지하자원들인 [[구리]]와 [[석탄]] 가격의 추이들부터 지켜봐야만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